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12살때였다.
무심코 들어간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어?’ 하고 난데없이 낯가림 같은걸 느꼈던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나는 나인가보군 하면서 살아왔는데 말이다.
그 날 처음으로 ‘ 그래서 내가 누군데? ’ 하는 의문이 들었다.
태어나 보니 나였고, 자라보니 나였는데, 그래서 도대체 내가 누구란 말인가?
갑자기 매일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던 모든 것들이 어색해지고 부자연스러워졌다.
그와 동시에 죽음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였는지도 모르겠다.
‘ 그럼 내가 죽으면, 내가 없는데? 그럼 어떡하나? 내 세상이 아예 없어지는 거로구나? ‘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당연히 내 얼굴이구나 하면서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사라지면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건데 뭘 할 수 있겠는가.
죽음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아예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버린다는게- 충격적이였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당연한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말이다.
그게 시작이 되어서 가끔씩,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영정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던가, 오열을 한다던가, 주저앉는다던가 하는 장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 이라는 것에 대한
비통함, 애틋함, 안타까움, 슬픔, 미안함, 죄책감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서 저러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서 나 또한 떠나보낸 사람들을 떠올리며 눈물 짓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외할머니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힘들어 할만큼의 사람이 사라지진 않아서 다행이다 싶다.
할머니를 완전히 떠나보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몇 년동안은 ’할머니‘ 라는 단어만 보거나 들어도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곤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갑작스럽게 누가 세상을 떠났다던가, 사고를 당했다던가 하는 글이나 매체등을 보면 어찌나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끼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면 어쩌나 싶기도 해서.
아무리 그래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은 주고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별이라는건 아무리 준비해도 도무지 쉬워지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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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내가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다던가, 갑자기 의문의 이유로 심정지로 숨이 멎는다던가 해서 떠나게 된다면
누가 나의 장례식장에서 울어줄까?
이런 의문을 내내 가졌던건 내가 가장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에, 엄마가 마음의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날은 엄마가 퇴근 후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그 때는 학교에서 날 괴롭히는 아이들 무리가 있어서 너무 힘들다고, 걔네 때문에 학교 가기도 싫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너무 힘들어서 가끔은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하면서 이야기 했는데
나의 힘든 마음을 다독여 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엄마에게선 차가운 대답이 날아들어왔다.
나는 말이 비수로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는 말 뜻을 그 날 정확히 이해했다.
“ 그럼 죽어. ”
어린 마음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솔직히 이 날의 상처가 내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날 이후로 나는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입을 꾹 다물었다.
부모라고 해서 꼭 내 편을 들어주는 건 아니구나 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도 그 날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엄마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수험생이던 언니의 도시락을 2개( 중식, 석식 ) 씩 싸고
우리들의 아침까지도 차린 후 8시 전에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서 도시락거리를 장봐오고,
집에 오면 밀린 집안일을 했던 터라 굉장한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당연하게도 아빠는 음주가무를 매우 자주 즐겼으며, 집안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본인이 힘드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자식까지 신경쓸 수 없었던거겠지 싶다.
또 내가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밖으로 당장 뛰어내릴 강심장은 아니라고 생각했을게 뻔하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식한테 저런 소릴 아무렇지 않게 했을까.
나는 저 말이 매번 생각날 때마다 칼처럼 가슴을 파고 들어가서 괴로웠는데
나이들어서 다투다 이 얘기를 했더니 자기가 언제 그랬냐며 기억을 못하시더라. 야속했다. 상처주고 잊어버리면 다 끝인가.
나는 20년이 흐른 지금도 저 날의 엄마 뒷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생생한데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거기다 플러스로 내 주변에는 은근히 우리 엄마처럼 차가운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가끔은 내 장례식장에 올지 안 올지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직장동료에게도 한번 슬쩍 물어보았다.
“ 근데, ㅇㅇ씨는 내가 죽으면 장례식 올거에요? ”
“ 당연하죠 뭘 당연한 소릴 해요??? ”
“ 올~~~~ 아니 너무 멀어서 안 올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크크 ”
어디 아프냐고 무서운 소리 하지말라면서 질색팔색하던 K씨..
난 씨익- 웃으면서 온다 했으니 꼭 오라고 안오면 귀신인 채로 당신 꿈에 나타나서 괴롭힌다고 덧붙이며 웃어넘겼다.
그냥 누구든 와서 울어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와준 것부터 감동인데 그럼 되게 고마울 거 같고.
아무튼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나는 문지기 귀신처럼 장례식장에서 기웃대면서 누가 오고 누가 안오나 하고 다 지켜볼 셈이다.
안 오는 사람들은 꿈에 찾아가서 맨날 악몽꾸게 해줄테다.
장례식장 찾아온 사람들한테는 로또 번호 한 개씩은 알려줘야지. ( 당첨번호가 뭔 줄 알고 )
그냥 요새 드는 생각은, 내 장례식장에 와서 누가 한 명이라도 울어준다면 그냥 그걸로도 충분히 훌륭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 사람에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였구나- 하고 느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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